문짝 하나에 담긴 시대의 욕망
앞 글에서 세종 13년(1431)의 하교를 봤습니다. 집의 칸수는 신분에 따라 정했습니다. 다듬은 돌과 화공, 진채와 단청은 왕실 밖에서는 아예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규정은 성종 대에 『경국대전』으로 묶였습니다. 그 뒤로 이 규정이 얼마나 지켜졌는지가 이번 글의 질문입니다.
다만 써 보니 처음 생각보다 확인되는 것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확인된 것과 아직 짐작인 것을 나눠 적겠습니다.
법전은 여러 번 다시 엮였습니다
조선은 『경국대전』 뒤로도 법전을 세 번 더 엮었습니다. 영조 대 『속대전』, 정조 대 『대전통편』, 고종 대 『대전회통』입니다. 골격은 끝까지 『경국대전』이었습니다.
집에 관한 규정이 이 법전들에 어떻게 옮겨 실렸는지는 아직 대조하지 못했습니다. 대조가 끝나면 이 자리에 적겠습니다.
금령은 유행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집 이야기는 아니지만 같은 시기에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가체입니다.
영조와 정조는 가체 사치를 막으려고 금령까지 냈습니다. 그래도 유행은 이어졌고, 가체 사치가 잦아든 것은 순조 무렵이라고 합니다.
실록 전체를 분석한 연구도 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치스러운 물건을 억누르는 기록이 더 많아지고, 특히 양반에게 검소를 강조했다고 합니다. 억누르는 기록이 많다는 것은 억누를 일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문짝에서는 어땠을까
여기서부터는 짐작입니다. 창호를 단속한 기사를 실록에서 직접 찾아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문짝 쪽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법이 금한 것은 단청과 화공이었지, 살의 모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손이 많이 가는 솟을살과 꽃살은 주로 전각과 절집에 남았습니다. 민가에는 세살과 숫대살이 섰습니다. 법이 정하지 않은 자리에서도 살에 들이는 품은 집의 격을 따라간 셈입니다.
사창도 그렇습니다. 창호지 대신 비단을 바른 창입니다. 장기인은 이 말이 시문학에 쓰인 것이고, 아주 훌륭한 건물이 아니면 거의 볼 수 없다고 적었습니다. 금지되어서 드물었는지, 비싸서 드물었는지는 이 한 줄로는 가를 수 없습니다.
지금은
지금은 누구나 문살을 고를 수 있습니다. 칸수도 기둥 높이도 법이 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을 짜는 쪽에서 보면, 고를 수 있는 사람이 늘었다고 문살이 다양해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파트 중문은 대개 비슷한 몇 가지 무늬로 모입니다. 예전에 법이 막던 자리를 이제는 값과 공정이 막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제 짐작입니다.
이 글은 여기까지 적어 둡니다. 실록에서 창호 단속 기사를 찾게 되면 고쳐 적겠습니다.
출처
-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 정월, 가사 제한 하교
- 『경국대전』(1485 시행),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
- 『가체신금사목』(정조 12년, 1788)
- 조에린·김장호, 「디자인을 통한 소비자와 국가의 갈등구조 관계의 고찰: 조선왕조실록에 기반한 문헌과 실증연구」, 2014. https://koreascience.kr/article/JAKO201434561606152.do
- 장기인, 『한국건축대계 Ⅰ 窓戶』, 보성각, 1983(2019 재판),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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